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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렁거리고 움직이고 멈춘》
개인전 서문
2023 김진주 기획자
내가 서 있는 위치를 고정한다. 어느 날은 터널을 지나며 흔들리는 창문이 내는 미세한 소리를 들을 것이다. 다른 날은 공사 현장에 적재된 파이프가 서로 부딪치는 형태를 볼 것이다. 어떤 순간에는 머리 위를 지나는 고가도로의 모습을 관찰할 것이다. 한번은 발바닥을 타고 솟구치는 땅의 진동을 느끼기 위해 바닥에 손을 짚을 것이다. 그것들이 울렁거리며 움직이기를 반복하는 모양을 듣고 보고 느끼다 보면 움직임은 서서히 멈출 것이다. 소리, 형태, 진동은 나의 몸과 상관없이 계속 움직이고 있지만, 자리를 고정하고 선 나의 위치가 멈춤을 체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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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진선은 도시에서 느낀 불안을 일상에서 찾은 재료를 통해 표현한다. 울렁이는 천과 이를 받치는 다리, 길고 단단하게 선 받침, 아슬아슬하게 쌓아 올린 지관,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판의 배열로 구성된 공간은 공사장이나 도로에서 본 풍경을 닮았다. 도시에서 관찰되는 건축 재료의 무게감과 소란함은 자연스레 불안을 길러낸다. 도시가 아닌 곳 또는 작은 도시에서 떨어져 나와 더 큰 도시에 속하게 될 때 그곳에서 만나는 새로운 인공물은 이전에 없던 당혹감을 준다. 여기서 말하는 인공물이란, 형태를 갖춘 건축 자재, 조경 요소뿐만 아니라, 사회적, 심리적으로 교착되어야만 하는 도시 생태계가 지닌 삶의 조건까지 일컫는다. 안진선은 이처럼 도시에서 느끼는 유무형의 불안을 도시에 놓인 특수한 재료에 대입해 상상하고, 이를 가볍고 쉽게 움직이는 소재로 치환함으로써 안정감이 부재한 불안의 감각을 살핀다.

공간과 작업에는 시점과 무게에 관한 고찰이 있다. 안진선은 도시를 바라보는 위치의 높낮이를 조절해 관찰하는 시점을 옮긴다. 이전 작업에서 위성이나 비행기의 시점, 도시를 걷는 시점을 활용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고속버스에 탑승할 때 맞춰지는 눈높이를 가져온다. 지면에서 대략 2미터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눈에는 광활한 공중이나 낮은 지대에서 보지 못하는 것이 보인다. 새처럼 위에서 아래로 널찍하게 보는 시야와 벌레처럼 아래에서 위로 고개를 들어야만 보이는 시야의 중간에서, 일상의 풍경에 절로 눈이 닿듯 편안한 거리감과 모든 것이 빠르고 거칠게 지나가는 속도감이 형성된다. 재료의 무게는 공간과 작업이 지니는 안정감의 정도를 결정한다. 시멘트, 철, 나무 등의 건축 재료는 무게로 분류되어 작업의 원천이 된다. 이때 실제 도시에 있는 것과 동일한 재료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가벼운 것과 무거운 것, 고정형의 것과 조립형의 것 등 서로 반대되는 성질을 조합해 새로운 물체를 만든다. 이처럼 일상에 더욱 가까워진 시점, 이질적인 것의 조합은 안정감이라는 관념에 혼란을 가중하는 상태를 연출한다.


합치기

안정감이 뒤틀어진 이곳은 파편적인 모양들을 집결시켜 불안의 감각을 길러내는 하나의 장면이 되어 간다. 공간의 상하좌우 면적을 정확히 계산하고 그곳에 놓일 것 사이의 거리를 따진 뒤 소재와 크기, 위치를 결정한 물체들이 놓여 있다. 가벼워 보이는 갈색의 지관통, 시멘트와 철근의 색을 닮은 받침대, 회색 조의 도로를 흉내 내는 천과 다리, 미끈하고 불투명한 함석판. 도시에서 익숙하게 보이는 재료의 색과 형태는 이곳에 놓인 물체 위에서 섞이고 섞이며 기존의 것과 조금씩 어긋난다. 이곳을 바라보는 시선은 들리는 소리나 보이는 형태, 느껴지는 진동 등의 여러 요소 중 먼저 인지되는 것에서 후에 인지되는 것으로 흐름을 만들며 이어진다. 산재한 모양들을 넘어 올라가고 내려가는 시선, 물체 사이에 몸을 구겨 넣는 행위, 사방에 귀를 기울이는 몸짓이 자연스레 솟아난다.

한번 형성된 흐름은 멈추지 않는다. 문을 열고 닫거나 몸을 움직일 때마다 실제로 물체들이 흔들리는 순간이 나타난다. 또는 눈에 보이는 움직임이 없을지라도, 흐름이라는 인상을 떠올린 뒤로 흐름에 관한 환영이 계속된다. 멈추고자 하는 의지로 그 움직임들을 멈출 수는 없다. 그럴 때, 즉 물체의 움직임이 정지된 상황을 상상하는 일과 지속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상황을 마주하는 현실이 동일하지 않을 때, 시선을 둔 이는 점점 불안을 느낀다. 간혹 이곳에서 본 것들은 멈출 것이다. 그러나 곧 다시 움직이고 말 것을, 멈추지 않는 흐름이 이어질 것을 인지하면서부터 불안의 감각은 정해진 끝이 없이 시작되고 만다.


전이하기

미세한 움직임으로 채워진 이 공간은 안진선이 도시에서 느낀 불안을 이곳에 온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이하기 위한 세팅이다. 불안이 시작된 이후, 그것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이전으로 돌아가기란 어렵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움직일지 예측할 수 없는 상태의 순환은 불안을 그저 지속시킨다. 글씨를 써 붙이거나 소리 내어 말하며 직설적으로 경고하는 일과 달리, 불안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머릿속에 스며든다. 이러한 구조는 어쩌면 불안이란 사실 그것을 인지하는 순간을 필요로 하는 대상이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안진선은 자신이 느낀 감각을 이곳에 온 이에게 전이함으로써 그 사실에 대해 발화하고 있다.

도시를 보았던 안진선이 그러했듯 이제 이곳에 온 이에게도 불안은 사라질 수 없는 대상이 되었다. 가능한 것은 눈을 굴리고 두리번거리며 지금 느끼는 감각의 출처와 이유를 파악하려는 일 뿐이며, 그것의 현현을 체감하는 일은 멈출 수 없다. 구석진 공간에 흰색의 부드러운 공 하나가 보인다. 이 공은 위성지도의 ‘핀’(pin)처럼 이곳에 선 나의 위치를 나의 몸을 대신해 표시한다. 2017년에 안진선은 구역을 정해 이 공을 굴리며 자신이 선 곳의 정체와 그곳에 선 연유를 찾으려 했다. 반복하여 굴리기 그 자체가 목적이었던 정형행동은 이미 공을 굴리는 감각 외의 것은 알 수 없다는 결론을 전제하고 있었다. 그 공과 공을 굴린 목적은 다른 물체들과 함께 이곳에 다시 놓였다. 한없이 가벼운 천으로 만들어져서는 ‘고정시키다’라는 그것의 본래 의미에 가닿지도 못하게 제자리에서 쉼 없이 흔들리면서 말이다. 무게와 시점에 대한 고찰에서 시작된 불안을 이해하려는 행동은 결국 고정되어야 하는 것마저 뒤틀어 버리며 점차 안진선 자신에게서 다른 이에게로, 이 공간에서 저 바깥으로 퍼져 간다. 이미 이 글에서 짚었듯 불안은 그것의 출처 또는 이유와 무관하게, 우선 누군가의 시선에서 직시되어야만 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Centurial Trio》
기획전 서문

2024 이아현 기획자
평범하지 않은 자들을 위한 내일

당신의 하루, 길게는 일주일을 복기해보자. 침대에서 눈을 뜨는 순간부터 집 밖을 나서기 전까지, 누군가 의 도움으로 단정하게 아침을 맞이했을 것이다.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가도 비슷한 상황은 반복된다. 당신이 서 있는 그 길은 크고 작은 손길을 거쳐 안전하고 깨끗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귀가해 잠들기 전까지 당신 의 세상은 한 명의 돌봄으로만 온전하지 않다. 오늘도 세상은 이들의 희생과 책임에 빚을 진다. 이들은 타인 을 돌볼 권리를 강요받지만,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다. 물질적이든 비물질적이든.

팬더믹으로 모두가 외출이 제한되면서, 한정된 공간에만 머물다 보니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을 깨 달았다. 매일매일 깨끗한 침대 위에서 기상하고 맛있는 밥을 먹고 집안일이 밀리지 않을 수 있는 건 모두 돌 봄 노동을 제공하는 존재 덕분이라는 것.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는 그의 노동으로 유지되고 있다. 우리는 왜 희생하지 않고 행복을 얻을 수 없는가. 희생이 불가피하다면 소수에게 그 책임을 묻는 것보다 모두가 배분하 는 법이 더 민주적이지 않은가.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노동은 ‘몸을 움직여 일을 함’, ‘[경제]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얻기 위하여 육 체적 노력이나 정신적 노력을 들이는 행위’로 정의된다. 돌봄 노동은 전자의 경우에 가깝지만, 단순히 일을 한다고 보기가 힘들다. 한 인간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노동력을 제공하나 다수의 경우 반강제적으로 행하 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 몫의 노동을 합쳐 한 사람이 지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가시화되지 않고 몇 세기 동안 여러 사람이 해야 할 노동을 하루하루 해치운다.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이들이 가꾸어낸 사회는 불편한 행복을 내재하며, 평범한 일상이란 사실 기울어진 원판 위에서 균형을 잡는 사람이 짊어진 숙 제였다.

불평등한 안정 아래서 이제 우리는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전시는 랑시에르가 노동자는 생산하지 만, 사유할 수 없다는 불평등의 논리를 반박한 순간과 동행한다. 노동의 일상성과 예술의 예외성에 관한 문 제 제기에서 비롯해, 감성계의 분할을 통해 노동자가 자신의 몫을 갖고 예술의 전위를 바탕으로 이를 가시화 하고자 한다. 김지윤은 파운드 오브제를 활용한 키네틱 장치와 조각을 통해 일상에서 조명되지 않은 것들의 감정을 풀어내고 있다. 그는 전시에서 평탄한 하루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적응 노동’의 이면을 은유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고통과 통증을 마주하도록 한다. 안진선은 도시의 장소성에서 기인한 감정과 재료, 시점을 바 탕으로 조각과 설치를 제작한다. 그는 영주아파트를 탐색하고 전시 공간과 어울리는 재료를 찾아 공간에 남 겨진 흔적과 어우러지는 작업을 선보인다. 집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흔적이 하나의 조각이 되어 두 작가의 작 업과 어떠한 선율을 만들어내는지 실험한다. 안초롱은 사진 이미지 과잉 시대에서 전문가의 사진과 아마추 어의 사진 경계의 모호함에 대해서, 결국 무엇이 사진으로 남을 수 있는지 질문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할머 니를 병간호했던 시간을 기록한 휴대폰 사진을 전시의 형태로 보여준다. 가족이라서 마음이 복잡했던 시간 을 프레임에 담는다.

세 작가가 조합한 음악은 집에서 시작되나 이곳에서만 들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돌봄이 필요한 모든 환경에서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던 사람들에게 나아가고자 한다. 나아가 이 음악은 익숙한 공간을 전 유하여 쓰는 또 다른 역사다. 그 이야기에는 이들의 삶을 이해하는 도구가 등장할 것이며(김지윤), 과거의 흔적을 발굴하고 보존하며(안진선), 그 옆에서 삶을 목격하는 이(안초롱)가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완성된 이야기의 끝에는 한 세기가 넘도록 연주될 선율만 남아있기를 바란다.